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문단 편집) === 전쟁을 끝낼 수단이었다 === || [youtube(BmIBbcxseXM)] || || 미국 보수 유튜브 [[PragerU]]의 영상[* 밑에 내셔널지오그래픽 같은 주류 언론이 아닌 강경우파 유튜브라는 것을 감안은 해야겠지만, [[자유주의]] 성향으로 PragerU에 비판적인 [[래셔널위키]]에서도 [[https://rationalwiki.org/wiki/Atomic_bombings_of_Hiroshima_and_Nagasaki|비슷한 논조의 내용]]이 있다.] || 1945년 8월 시점에서 미국 정부는 이 방법 말고는 일본의 항복을 빠르게 받아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직전까지 일본이 항복을 거부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아래에서 주장하는 일본이 내세운 항복 조건은 휴전 내지는 무승부와 같은 조건이라서 연합군이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이미 연합군은 독일과의 휴전 협정에서 무조건 항복만을 강요했고 그 외 일체의 협상을 거부했다.[* 연합군이 일본에 비교적 자비로웠던 이유는 일본을 점령한 뒤 향후 냉전 구도에서 일본이 어떤 역할을 해주길 원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다만 정말로 일본에 전후(戰後) 냉전 구도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길 원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왜냐하면 딱히 연합군이 일본에 자비로웠다고 보기도 어려웠던 데다가, 전후(戰後) 처리만 봐도 일본에 소련으로 대표되는 공산권을 막아낼 교두보 역할을 목적으로 한 뒤처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원폭 투하 직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몰락 작전|일본이라는 나라를 지도상에서 지워버리고, 일본어를 지옥에서나 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만들 작전]]을 구상했고, 일본에 요구한 내용도 독일과 마찬가지로 무조건 항복이었으며, 말도 안 되는 조건이었지만 일본이 내건 전쟁 전에 보유했던 식민지 유지는 물론 결국 허용해주는 천황제 유지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또한 전후(戰後) 일본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일본의 재벌들 및 전통 귀족인 [[화족]] 계층을 모조리 해체했고, '동양의 [[스위스]]' 운운하며 근대적 농업 국가로 개편하려 했던 미국의 행적을 생각해보면 [[냉전]] 구도에서 공산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일본에 요구하려 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일본이 지금의 공업화와 산업화로 재도약한 계기는 전후 [[베를린 봉쇄]]로 대표되는 냉전의 급진전과 뒤이은 [[6.25 전쟁]] 특수성 때문이었으며, 6.25 전쟁은 [[스탈린]]조차도 [[김일성]]의 생떼를 48번이나 거절할 정도로 급작스러운 변수였다. 6.25 전쟁이 없었다면 일본은 지금의 [[스위스]]처럼 근대적 농업 국가의 형태로 재개편된 채 그대로 유지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6.25 전쟁 이전에도 이미 미국은 [[역코스 정책]]을 통해 전후 일본 경제의 부흥에 힘썼으며, 뒤이어 중국의 공산화 및 극동에서의 [[공산주의]] 확산이 빠르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를 확신하기는 힘들다.] 그때 당시 미국 여론은 전쟁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몰락 작전 같은 대규모 군사 작전을 시행하기 꺼릴 수밖에 없었고, 또한 만주 작전이 유례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지만 [[소련]]이 참전한다고 100만이 넘는 일본 관동군이 1주일만에 깨질 것이라 예상하기는 힘들었다. 결국 원폭 투하가 없었다면 [[몰락 작전]]이 실행되어 전쟁은 장기화되고 일본의 사상자는 훨씬 늘어났을 공산이 크다. 미국 내 몰락 작전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은 원자폭탄이 떨어지기 전에 미군이 [[도쿄 대공습]]을 비롯하여 일본 본토에 무차별 공습을 가한 이유이기도 하다. 저 작전을 시행하기 이전에 [[커티스 르메이]]가 상관으로부터 받은 명령이 "[[도쿄 대공습#s-8|몰락 작전이 시행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본의 산업 역량을 무력화하라]]"였다.[* Kozak, W., LeMay: The Life and Wars of General Curtis LeMay, 2009.] 실제로 트루먼이 핵 투하를 결정한 건 일본의 항복 논의가 3건에 불과하고, 결사항전을 결의한 정보는 13건에 달한다는 사실을 울트라 특수도청팀이 [[http://mnews.joins.com/article/1651728#home|도청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여기에는 당시 일본 외무재상이 주소 일본 대사에게 "우리는 소련에 무조건 항복 같은 중재를 요구하는 게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 더군다나 미국이 원폭 투하와 전후(殿後) 처리를 서두른 이유 중에 하나가 [[소련]]의 대일 행동을 의식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 본토가 직접적인 전장이 된다면 소련이 일본 열도의 일부를 점령할 가능성이 높고, 이것은 4년 가까이 태평양에서 거의 혼자서 일본을 상대했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물론 [[중일 전쟁]]이나 [[임팔 작전]]과 같이 미국을 제외한 연합군도 일본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지만, 태평양 전쟁의 주 무대는 당연히 [[바다]]였고 일본과의 해전은 99% 이상 미국과의 해전이었다. 당연히 미국으로서도 미국이 한창 싸울 때는 불가침 조약 운운하며 도움 하나 주지도 않더니, 다 조져놓으니까 뒤늦게 와서 자기 지분을 떼 가려고 하는 소련의 요구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실제로도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이 트루먼에게 8월 내내 [[홋카이도]]의 남북 분할을 요구했지만 트루먼이 무시했던 바가 있다.[* 그 대신 소련은 만주 작전을 계기로 만주까지 진출하였고, 그 과정에서 [[청진시|청진]]과 같은 한반도 북부 일부 지역까지도 진출하여 무장 해제를 담당했다. 반면 미국은 일본을 완전히 점령하고 뒤늦게 한반도에 상륙했다. 결국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38선을 기준으로 분할하였고, 이는 현대 [[남북분단]]의 계기가 되었다. 즉, [[추축국]]이었던 일본 대신 엉뚱한 한반도가 분단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분단국 신세가 되었던 [[독일]]의 패망에 있어선 [[소련]]의 지분이 컸지만 [[미국]]과 [[영국]] 등 서방 연합국의 지분 역시 무시하기 어려웠기에 서방 연합군도 독일에서 자신들의 몫을 많이 챙겼다. 반면 일본의 패망에는 미국이 절대적이었기에 미군 장병들의 희생을 생각해서라도 소련이 일본에 숟가락을 얹는 것은 트루먼으로서도 용납할 수 없었다. 이는 [[한반도]]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육로로 연결된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진출을 막을 방도가 없었기에 미국이 부랴부랴 38선을 제시했다.] 현실적으로도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는 일본의 항복과 한국의 광복을 앞당겼으면 앞당겼지 그 반대의 효과는 없었다. 따라서 만약 원폭 투하 대신 일본 본토 결전이 발발하여 일본이 늦게 항복했다면 일본 역시 미국·소련에 의해 분단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참고로 한반도의 경우 소련이 [[만주 작전]]을 펼치며 남하하는 상황이었기에 오히려 원 시나리오대로 분단되거나 아예 전역이 공산화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2차 대전으로 한정해도 영국 대공습이나 [[드레스덴 폭격]], [[도쿄 대공습]]은 일상적인 전투 행위였고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만 별도의 학살로 볼 이유는 없다. 도시가 거의 소멸되었고, 압도적인 민간인 피해를 발생했다는 점에서 전자와 후자의 차이가 없다. 게다가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이 기회도 안 주고 느닷없이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도 아니다. [[포츠담 선언]]까지 갈 필요도 없이 이미 [[사이판 전투]]의 결과로 일본의 본토가 [[B-29]]의 폭격 범위에 들어왔고, 45년 상반기엔 [[도쿄 대공습]]을 비롯한 굵직한 폭격 세례들이 날아왔으며 이로 인해 일본은 이미 궤멸적인 피해를 입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항복하지 않고 연합국의 요구에 비협조적으로 일관한 것은 바로 일본이다. 결국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일본 군부의 고집으로 원자폭탄을 피할 기회를 상실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일본 제국]]은 분명히 악의 제국이었다. 일제는 [[731 부대]], [[난징 대학살]] 등 나치에 버금가는 [[전쟁범죄]]를 저지르며 극동에서 많은 전쟁 피해자들을 야기했다. 또한 일본이 항복했던 그 순간에도 일본은 여전히 [[중국]], [[조선]], [[인도네시아]], [[베트남]]과 같은 주요 인구 밀집 지역들을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었고, 일본군의 만행과 수탈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점령지에서 민간인 수십만 명이 달마다 일제의 폭정으로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만약 미국이 원자탄을 투하하지 않았다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죽은 민간인들보다 훨씬 많은 아시아인들이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례로 일본군의 쌀 수탈로 인해 1944년 10월에서 1945년까지 100만 명의 [[베트남인]]들이 아사했다. 게다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731부대에 끔찍한 인체실험들을 명령했고, 사로잡은 연합군 포로들을 다 죽일 계획까지 짰는데 자신들의 전쟁범죄가 밝혀질 것을 우려한 일본 정부는 연합국이 상륙을 게시하자마자 '''모든 연합국 포로들을 독가스, 폭탄, 참수, 수장 등의 극악한 방법으로 '처리'할 것을 명령했다.''' [[https://www.loc.gov/item/afc2001001.00454/?ID=pm0003001&page=1|#]][[https://en.wikisource.org/wiki/Kill_All_Prisoners_Order|#]]] 이렇게 극악한 제국의 만행들은 [[원자폭탄]]이라는 다소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중단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